[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日 전국시대 통일 다진 오다 노부나가…그의 무기는 '무역'이었다

입력 2023-04-19 18:10   수정 2023-04-29 16:21

일본에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일본과 외교적인 문제가 터질 때마다 “가지 않겠습니다”, “사지 않겠습니다”고 핏대 올리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 한·일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민간 교류는 더 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답답했다. 역병도 끝난 마당이라 훌쩍 나가고 싶었다. 마침 가수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가사가 유난히 와닿았다. 봄이 지척에 있는 이즈음에 뜬금없이 낙엽? 떨어지기만 하면 됐지 벚꽃이든 낙엽이든 뭐가 중요해. 뭐 그런 생각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악연(惡緣)은 우리의 분발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임진년에 맞고 그냥 넘어갔다. 을사년에 맞은 기억은 생생하다. 때리고 맞은 기억이 서로 엇비슷해야 아픈 게 덜한데 우리에겐 맞은 기억뿐이다. “13세기 말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제대로 상륙했더라면”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이유다(그렇다고 지금이라도 때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첫날은 오사카다. 오사카는 상업 도시다. 처음부터 그랬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이 있는 교토와 가깝고 수도의 외항 역할이던 오사카를 자신의 거점으로 정했다. 오사카성을 쌓고 ‘성 밑에 지어진 도시’라는 뜻의 조카마치를 건설했는데 인적 구성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조카마치는 무가(武家)의 저택이 70%였다. 오사카 조카마치는 그 비율만큼이 상공업자의 거리였다.


일본도 사농공상의 나라다(이때의 사는 사무라이 ‘사’자). 공상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는 도요토미의 최대 미덕이다. 1598년 도요토미가 병사(病死)하면서 정권이 흔들린다. 조선 파병을 하지 않아 군사력을 보존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겐 호기 중의 호기였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처첩(妻妾) 전쟁이었다. 도쿠가와 세력의 동군은 도요토미의 정실인 네네를 중심으로 뭉쳤고 도요토미의 유일한 혈통인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은 후처인 요도노노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결과는 동군의 승리. 전투의 무대가 된 오사카는 쑥대밭이 된다. 이걸 인수한 게 도쿠가와의 손자다. 도시를 재건하면서 사업 중단 상태였던 하천 개발을 완공했는데 이게 현재의 쇼핑 명소 도톤보리다.

오사카는 상업 도시의 전통을 이어간다. 각종 세금의 면제로 상업 활동이 왕성했고 이때부터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 소리를 듣는다. 각 번의 특산품이 오사카 다이묘의 창고에서 매매된 뒤 전국으로 옮겨진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상인들이 에도로 옮겨가면서 오사카의 상권은 쇠퇴한다. 대신 메이지 시대 이후 오사카는 상업과 경공업의 도시에서 중공업 도시로 성격이 바뀌었고 러·일 전쟁 무렵에는 공업 인구가 상업 인구의 머릿수를 넘어선다. 동양 최대의 병기 공장인 오사카 육군 조병창이 들어섰고 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폭격을 부른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며칠 뒤 미 공군은 오사카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고 1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한다. 오사카성도 이때 소실됐고 지금의 성은 기억과 기록을 되살려 새로 지은 것이다.

오사카 다음 일정은 교토다. 사람들은 교토를 천년고도(古都), 천황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내게는 다만 오다 노부나가의 묘가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다. 교토 시청 맞은편 혼노지(本能寺)는 오다가 잠든 곳이다. 묘에 그의 유골은 없다. 쿠데타가 일어나 수하에게 살해됐을 때 그가 머물던 같은 이름의 절이 화마로 잿더미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의 절은 도요토미가 그의 사후 10년 뒤 세운 것이다.

흔히 오다를 전국시대 통일의 농사를 지은 인물이라고 한다. 그걸로 도요토미가 밥을 짓고 도쿠가와가 숟가락을 얹었다고 하는데 농사가 있고 난 연후에야 밥도 숟가락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오다가 없었으면 도요토미도 도쿠가와도 없었고 당연히 임진왜란도 없었다. 도요토미가 공업과 상업을 중시한 것은 주군이었던 오다에게서 배운 것이다. 총포의 수입 때문이기는 했지만 오다는 무역에 공을 들였고 규제 없이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했다.

서양 문물 수용에도 인색함이 없었는데 관병식에는 벨벳 외투에 서양식 모자를 쓰고 참석했다. 다각도로 당대의 고지식한 다이묘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호감을 들자면 그는 미학적인 기준이 있던 사람이다. 단어를 구사할 때 정확도보다 느낌과 뉘앙스를 더 중시했다. 따라 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비슷하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느낌이 예쁘고 근사하면 그 단어를 쓴다.

벚꽃이 지는 혼노지에 나는 홀로 서 있다. “해줄 말이 있습니까” 물었더니 라틴어로 답이 돌아온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44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교류한다. 거기에는 한국인, 일본인의 구별도 없고 생자와 망자도 없으며 그저 흘러가는 역사와 거기에 실려 가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벚꽃 교토에서 나는 겸허와 겸손을 배운다. 감미롭게 서글픈 봄날이었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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